나는 가끔 꿈을 기억하고 드물게 잠들지 못한다. 잠 하나는 언제나 잘 자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밤이 그 '드물게'인 것 같다.
며칠 전은 '가끔'이었다.
꿈에서 난 재수가 지지리도 없는 제비를 뽑아서 편히 죽지 못하고 붕괴 직전의 어둡고 황폐한 세상에 남겨져 지구를 구해야 했다. 가족과 헤어질 때, 동생 앞에서만큼은 개폼을 잡으며 내가 어떻게든 하겠다고 큰소리를 땅땅쳤다. 내가 알던, 내가 좋아했던 모든 사람들이 없어져 버렸다. 지금은 세부적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온갖 고초를 겪던 중, 소 뒷걸음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우연히' 지구를 구했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있었고 세상은 멀쩡했던 예전과 '똑같았고' 난 지구를 구한 히어로가 됐다. 뉴스에 내 얼굴이 나왔다. 그 순간 불현듯 꿈 속의 난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세상은 내가 예전에 살았던 그곳이 아니고, 난 이미 사라진 내 원래 세상에서 똑같이 생긴 다른 세상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패러렐 월드로 '나 혼자' 도망쳐왔을 뿐이라고. 그리고 깼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친구에게, SF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좀 참신하고 재밌는 꿈이면 메리 셸리처럼 소설이라도 쓸 텐데 이건 뭐 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정들만 짜깁기되어 소설도 못쓰겠다, 그렇다고 복권을 해도 꽝일 것 같으니 개꿈이네, 개꿈!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괜히 낄낄거렸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따위의 부질없는 후회나 하며 '드물게' 잠들지 못하는 지금, 알겠다. 난 며칠 전의 그 기분 나쁜 개꿈을 꿔도 쌌다.